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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보물 
복음의 보물(1980년판) 복음의 보물(1980년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연구시리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연구시리즈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E. J. 와그너 목사는 원래 직업이 의사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이었다.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학생이었는데 개인의 구원에 관한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깊이 고민하던 중 어떤 영적 집회에서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그의 고백가운은 증언한다. 그 후 그는 십자가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깊이 있는 성경 연구를 통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의사 직업을 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여기에 올리는 주석은 와그너의 로마서 강해를 번역한 것으로 매격월간 출간되는 진리의 기둥과 터에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다. 로마서 강해 (E. J. 와그너) 
 갈라디아서연구 
 히브리서 연구 (A. T. 존스) 
주옥같은 구원의 설교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 구원의 설교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로마서 6장) ModifyDelete


로마서6장
로마서 6장은 5장에서 설명한 말씀을 계속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5장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도록 그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은혜는 은총이다. 시편 기자는 그의 은총에는 생명이 있다고 말했으며(시30: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하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한다. 이 생명은 죄없는 생명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순종하고 그의 순종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릭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1-5절).
이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되며 그 연합으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5장에서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아 넝뇌에 이르렀으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현 선고가 내렸다는 것을 배웠다. 사형 선고가 내렸었기 때문에 사망이 인간들 안에서 역사한다. 왜 사망이 인간들 안에서 역사하는가? 사망의 권세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고전15:56). 그러므로 인간들 안에서 역사하는 죄는 단순히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이다.
죄인인 인건들은 모두 사망의 쏨을 당했다. 사망이 이미 그들 안에 있고 그들 안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으므로 사망이 인간을 영원히 삼켜 버리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은혜의 ㄸㅒ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이러한 사망의 쏨과 그 형벌의 집행을 모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반면에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형선고가 모든 사람에게 내렸으므로 언젠가는 그 선고가 집행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언제 죽을 것인가를 선택할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죽고 이와같이 하여 그의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우리 자신 안에서 죽을 수 도 있다. 하여튼 우리는 죽지 않으면 안된다. 사망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에 느그나 죽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죄값으로 지불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는 전혀 생명이 없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요일5:12). 이제 사망이 우리에게 죄값으로 생명을 요구할 때에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우리가 생명없는 상태에 놓이리라는 것을 알지 않았는가? 만일 일백 만원을 빌렸다면 꼭 일백 만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그 빚을 다시 갚는다면 한푼도 남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생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이ㅣ 세상에서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이 생명은 율법에게 박탈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의 생명을 요구할 때에 우리의 이 생명은 가버리고 영원한 사망 외에는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에 아주 많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이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으며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이 지상에 와서 그 험난한 고난의 생애를 살 책임이 없었다. 그는 하늘에서 영광을 받았으며 모든 천사들의 찬양을 받았으며 부와 권세를 가졌었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영광과 권세마저 떠나서 가난한 인간으로 세상에 왔으며 스스로 종의 모습을 입고 모든 점에서 그가 구원하러 온 자들과 똑같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의를 완성하셨다. 무엇을 위해서 의를 완성하셨는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그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처음에 부요하였고, 하늘에 계실 때에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한낱 인간으로서 의와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의와 영원한 구속을 완성하셨다. 그가 이 지상에서 이룬 모든 의를 가지고 계시면서 그 의를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고 또 주신다. 이와같이 하여 율법이 선고한 형벌의 값을 티루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히서인가? 아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므로 율법이 그를 주장할 이유가 없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심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그가 고난을 받으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아소 그과 연합하고 하나가 될 때에 그가 주시려는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로부터 죄값을 징수할 것이기 때문에 죄값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는 데 율법이 우리로부터 죄값을 가져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든지 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을 수 있을 때에 죄값으로 내더줄 생명을 넘겨주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든지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붙잡는가? 어떻게 그의 의로운 생명을 받는가? 죽음의 행위를 통해서 그 생명을 받는다.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와 연결되는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어느 지점에서 그가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연합을 이루는가? 가장 낮은 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인간능 만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죽음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었으므로 형제들의 가장 낮은 점인 사망의 지점을 취하셨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지점에서 실제로 죽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침례 의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에 불과하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돠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로마서 6장 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한다. 여기에 사도행전 2장24절의 베드로의 말씀을 적용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음이니라.” 사망이 그리스도를 붙들어 두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면 또한 그와 함께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와 함께 다시 살 것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죽는다. 언제 죽는가? 바로 지금이다. 우리의 생명이 죄값으로 지불되는 것을 인정하고 이 생명에 대한 모든 권리와 이와 관련된 것을 모두 포기할 때에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을 포기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지는 생명에 무엇이 관련되어 있는가? 죄가 관련되어 있다. 죄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시기와 악한 생각과 악한 말, 이 모든 것은 육적인 생명을 구성하고 있다. 이 육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생애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죄의 요소들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생명에 들어있다. 우리가 이러한 죄악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에 이르러서 그들을 버리고 죄값을 지불할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대신에 그의 죄없는 생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이 생명이 죽을 때에 이 모든 죄악들을 버리는 것이며 이 모든 죄악들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며 그때부터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면 산다. 이러한 새 생명 곧 우리가 얻은 새 생명을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죄없는 생명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돠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6절)
여기에 모든 선교 사업의 비결이 있다. 사람이 참으로 자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점에 이르고 전에 소유했던 생명을 죄값으로 포기하고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생애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면 그때부터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이 되며 그 사람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있게 된다(골3:3) 이런 사람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으로 새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든 또는 무슨 말을 하든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좋지 않은 지방으로 가서 일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미 생명을 바쳤으므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보호에 맡기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 그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잠시동안 잠자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업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실망하지 않는다. 왜야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실제로 알고 있으며 마음 속에 그리스도보다 더 높아진 것들을 낯추신 그분이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생애의 모든 순간을 바치고 십자가에 죽을 때만큼 철저하게 헌신한다면 그가 사는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이다.
우리가 계속 죽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동일한 능력을 알고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그 능력을 받는다. 어떻게 받는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무덤에 누워 계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실 수 있었던 일을 우리를 위해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능력으로 우리가 죽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이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와 유대에 계실때에 생명으로 역사했던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얼마나 고귀한 사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사상은 우리가 죽음에 처할 때에라도 승리를 하게 만든다. 왜 그러는가? 사망의 쏘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허쓰나 째롬 샅은 많은 순교자들이 화형주로 가면서도 승리와 환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온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으므로 악인들의 권세나 심지어는 마귀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이미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우리의 생명이 그와 함께 감취어 있을 때에 이 생명이 곧 끊어지고 있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그는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신다. 악인들이나 마귀가 무덤 속에 그리스도를 붙들어 둘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의 생명을 손댈 수 없다.
오! 우리가 그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기 바란다. 우리가 그 생명을 얻었을 때에 나아가서 기별을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돠 함께 할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할 때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는 죽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으므로 지금 우리가 사는 생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그를 믿는 믿음의 생애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죽으면서까지도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하는 소망이다. 이것은 부활의 소망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누워 잠들도록 부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은 지상에 살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확실하고 오히려 더욱 확실하다. 그의 은혜의 기간은 끝났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그의 가야할 길을 다 갔으며 믿음을 지켰다. 그러므로 아마 사도는 소망없는 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생애와 관련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었을 때에 그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고 우리의 생명을 잠시 세상에 살려 둔다 하여라도 좋고 이와는 반대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좋다. 무덤에서 잠들어 있건 또는 지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일을 하든지 간에 항상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이런 사상을 깨닫고 우리의 사상으로 삼아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사상을 가질 때에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 된다. 전에 우리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리기로 한다면, 그때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바칠 수 있다. 우리가 즐거이 희생하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며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우리의 옛 생애와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리며 육신을 위하여 살지 않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리스도늬 능력이 우리에게 임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지상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명을 포기했으므로 이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육신에 상관된 모든 것을 부인하는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는 우리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거신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 앎이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는 자원하여 사망의 영역을 통과하셨다. 이렇게 하여 사망을 지배하는 그의 권세를 과시하였다. 무덤 속에 들어가서 바로 그곳에서 그의 권세를 보여 주셨으며 감옥의 쇠사슬과 같은 무덤에 묶여 있었으면서도 그 쇠사슬을 완전히 부쉬어 버리고 자유스럽게 풀려나와 정복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므로 우리가 그의 죄없는 생명을 받을 때에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길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관할 수 없는 것 같이 이 사망의 쏘는 것인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다.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죄를 지을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아’라고 어떤 사람은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하는 말이 아닌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4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되었는가? 죽음으로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육신이 그 정욕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릴 때에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되며 그 후부터는 그의 능력을 신뢰하여 계속 복종하는 상태에 머무른다. 나는 하나님께서 능히 이렇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를 드린다.
군인들이 다를 나라를 정복하기 위하여 위험한 원정을 떠나는 경우 그들이 그 나라에 도착했을 때에 타고 온 배들을 불태워 버린다. 그러면 돌아가고 싶어도 되돌아 갈 수가 없다. 우리가 이런 희생을 깊이 생갹해야 한다. 무턱대고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모든 싸움터를 살펴보라 이곳에도 이런 향락 저런 방탕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버릴 수 있는가? 이것들이 나에게 매우 귀중한 것들이었으며 바로 재 생애에 얽혀 있었다 이것들이 나와 하나가 되어 있었으므로 내 용모에 나타나고 내 품성 속에 자리잡고 내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삶 자체에 집착하였을 때에 이것들에게 집착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것들에 빠지지 않으셨으며 또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 나는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기 위하여 그 십자가를 참을 수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부요함과 그의 구원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기 위하여잠시 죄악의 낙을 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스스로 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위를 쳐다보고 그리스도와 현재의 구원의 즐거움을 보라. 정반대의 장면이 전개된다. 거기에는 부한한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가 현재 누릴 수 있는 그 즐거움을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받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세에 동참자가 되겠는가? 이것은 영원히 지속될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우리 뒤에 있는 배와 다리를 불태워 버리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매우 귀중했던 이 모든 것들을 영원히 버릴 수 있는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전에 이것들을 버릴려고 노력했지만 다시 넘어졌다. 지금도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오! 그렇지 않다. 이번에도 새로운 결심을 하고 새 출벌을 하지 않으면서 보다 더 나아지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저 옛 생애와 모든 결심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고 있다. 단순히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하나님 안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리신 그 능력의 손에 내 자신을 굴복하면 그 능력이 나를 새 생명 가운데 살도록 계속 붙들어 주실 것이다.’ 날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의 놀라운 능력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육신이 그 정욕을 행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생명으 붙들어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 안에 이루어진 기적인 그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느낄 때에 우리가 지금까지 흔히 굴복했던 시험과 정복했던 죄의 습관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전과는 달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 나아가서 기별을 전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능력을 가지게 될까? 만일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그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면 누구에게나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업은 인간의 견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사면에서 어려운 일이 일어날 뿐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고후10: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이같은 기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 주실 수 있다. 이같은 능력이 여리고의 성벽을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무너지게 하였다. 우리를 그의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인 것을 대단히 감사한다. 그 능력을 붙잡고 그 능력이 우리의 것임을 입증하라.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와같이’는 무엇과 같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 죽지 아니한 같이 이와같이 너희 자신을 다시는 죄짓지 않도록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인가? 죄가 너희를 더 이상 주관치 못한다는 것을 각별히 주목하라. 이것은 성경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제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머물러 있다. 영광과 은혜의 영이 우리와 함께 있다.
그리스도 안에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무엇인가? 주목해 보라 은혜는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총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궁한 생명력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진정으로 믿으면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으며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사도의 말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엄숙하면서도 영광스러움 사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할 수 있고 어떤 지능의 제한없이 6장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을 얼마나 감사해야겠는가? 그렇다. 이 말씀을 믿으라.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7,11).
그러나 사람이 죄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다. 우리의 과거 생애는 다시 돌이켜 보고 싶을 만큼 즐겁지 않다. 과거의 생애에는 선함이 없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의에 대하여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가? 우리가 사단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나라.’ 그리스도는 의의 창시자이시다. 우리가 드리는 봉사는 그의 것이다. 우리는 사단의 종인가 또는 하나님의 종인가? 사단의 종일 때에는 의를 전혀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도히었다.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섬기는 일은 두 종류 밖에 없다. 사단을 섬겨 죄에서 사망에 이르고 그리스도를 섬겨 순종으로 의에 이른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믿는다. 죄와 의를 동시에 섬기기란 불가능 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여기 저기에 죄를 지을 조그만한 구멍들을 남겨 놓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무죄한 생애이어야 한다는 것을 믿으려고 감히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그것을 믿거나 전파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 왜 그러는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율법을 충분히 전파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율법을 감하거나 낮추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높이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면 죄를 범하고 육신이 그 정욕을 이루도록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죄를 짓게 하는 자인가? 우리가 죄를 짓고 있는 동안 누구의 종인가? 죄의 종이며 죄는 사단으로부터 왔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어떤 때는 죄를 짓고 어떤 때 는 의를 행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단이 동업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런데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므로 한 주인만을 섬겨야 한다.
빛과 어두움 곧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교제가 없다. 서로 무서운 원수지간이며 대립되어 있으므로 죽기까지 싸움을 싸웠다.
어느 쪽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전연 불가능하다. 어느 한 편을 섬겨야 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죄의 종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렸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옛 생애에 대하여 죽을 수 있을까?’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 종이라고 변역한 말은 노예라는 의미이다. 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려 그의 종이 되는 순간 나는 그의 노예가 된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속한다.
만일 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면 그가 나를 받아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꼐서 나를 샀고 값을 치루셨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죄에게 종으로 두렸을 당시에는 줄곧 나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무시하였었다. 그러나 죄의 종살이에서 물러난 지금은 줄곧 그리스도꼐서 나를 찾아다니시며 나를 그에게 이끌어 갈려고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여 내가 왔나이다 내 자신을 주님에게 드리나이다.’라고 말할 때에 그 순간 그리스도는 우리를 찾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를 발견하셨으며 우리는 그의 종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그를 섬기게 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우리가 죄의 생애를 살았던 것을 아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될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생각할 때에 두 자인의 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왜냐하면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고 그의 원하는 대로 우리를 이용하였으며 그의 권세의 처분에 따랐다.
죄가 의보다 더 능력이 있는가? 사단이 그리스도보다 더 능력이 있는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더 능력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다. 우리가 죄의 노예였을 때에 사단이 우리를 의와 상관없도록 지킬 권세를 가졌던 것같이 우리 자신을 드려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때에 그는 우리를 죄로부터 지킬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싸움은 우리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싸움이다. 그리스도와 사단은 동업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는 가장 격렬한 증오가 있다.
누구나 ‘그리스도와 사단 간의 대쟁투’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우리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말이다. 이 싸움은 무엇에 대한 싸움인가? 인간의 영혼과 그들의 거주 영역에 대한 싸움이다. 누가 여러분과 나의 섬김을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은 그들이 싸우고 있는 문제이다. 이 싸움은 그리스도와 사단 간의 싸움이다. 그들은 싸움의 주인공들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싸움이 오로지 그들 간에 있을 뿐이다.
이것을 꼭 말해두어야 하겠다. 그들 중에 어느 하나도 우리의 의지의 동의없이는 우리의 섬김을 받을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사단을 대적하여 설 능력이 없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대적할려고 많이 시도해봤지만 그를 대적할 능력이 없으며 그와 맞부딪쳐 정복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전혀 능력이 없지많 이와 동시에 그의 종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종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의 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단을 대적하기 위하여 우리의 힘을 쏟는 대신에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고 시편 기자 다윗과 같이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를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주장한다(시 116:16).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사단의 노예였으나 ‘당신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그리스도에게 말하는 순간 나의 결박을 푸시고, 낭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는 사단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책임을 지신다. 그러므로 사단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가서 다시 그의 종으로 삼으려고 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사단을 만나신 것처럼 그를 만나신다. 그러므로 그저 우리의 마음과 사단에게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가 나의 결박을 푸셨다고 말하라. 그러면 우리의 결박이 진정으로 풀린다. 우리는 값을 지불했으므로 이제 다윗의 말을 받아들여 거듭거듭 되풀이 하여 주장할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의 생명과 존재가 사단을 대적하여 싸운다. 싸움은 우리의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은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30).
그리스도와 사단 간의 싸움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하고 있으며 우리는 은밀히 장막에 감취어져 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기셨으며,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잡을 때에 사단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그가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에베소서 1장 19절로 21절의 귀중한 말씀을 주목하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뛰어난 그 높은 곳에 그리스도를 앉히신 그같은 능력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 놓으셨는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모든 정사와 권세위에 뛰어난’곳이다.
이제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를 얻으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이룩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획득하신 것같이 우리에게 그의 평강을 주신다. 그러므로 시험의 때에 우리는 이미 획득한 승리를 가지고 있다. 싸움은 우리의 머리 위에서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큰 평강이 있다. 언제나 평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복종에 있고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데에 있으므로 그가 우리를 지키시고 그이 장막에 감추어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으면 시련이 얼마나 큰가는 문제가 되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평강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가지려는 욕망으로 충만하게 되고 바로 오늘 밤에 우리가 이 말씀을 받아들여 그 말씀의 영감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되고 그의 생애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교사로 다니면서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능력을 받을 때에 사업은 오래지 아니하여 의로 끝마치게 될 것이며 아직까지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꼭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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